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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成龍宗孫家遺物 1괄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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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선생 이 직접 사용하던 것들로서 갑주, 가죽신, 상아홀, 갓끈, 관자, 유서통, 동국지도 서애선생 수택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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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호 |
류성룡종손가유물 목록 |
종/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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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직접 사용하던 유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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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모부인(母夫人)의 곤문기(昆文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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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에게 내린 조정의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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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직접 사용하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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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주(甲胄:갑옷과 투구) 1구(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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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란 중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전지(戰地)에서 착용하였던 것이며, 투구는 앞면에 반달 모양의 가림이 있고 네 쪽의 철편(鐵片)을 연결하여 만들었으며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으나, 갑옷은 가죽 조각을 비늘 모양으로 꿰매여 붙여서 만든 것으로서 연결 끈의 손상이 심하여 원상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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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화(革靴:가죽신) 1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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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가죽을 측면에 대고 바닥은 5중(重)으로 하여 꿰맨 가죽신이며, 일부에 손상은 있으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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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홀(象牙笏) 1개(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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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笏)이란 신하들이 임금을 뵐 때나 종묘사직에서 제사지낼 때 예를 갖추기 위해 두 손을 모아서 쥐던 패를 말하며, 여기에 왕명을 메모하기도 하였다. 이 홀은 상아로 만등어져 있으며 길이 41㎝로 우유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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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끈 4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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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립(戰笠:군인이 쓰는 벙거지)용과 입자(笠子:갓)용이 있는데, 모두가 위계에 따라 다르게 꾸며져 있으며,
1. 호박(琥珀) 갓끈(길이 86㎝, 73聯)
2. 골제(骨製) 갓끈(길이 85.5㎝, 회백색 72聯)
3.오칠목제(烏漆木製)갓끈(길이 84㎝, 74聯)
4.밀화(蜜花) 갓끈(길이 84㎝, 담홍색 구슬 302聯)의 4종(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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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貫子) 6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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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건에 달아 망건 줄을 꿰는 작은 고리를 관자라 하며, 품계에 따라 다른 관자를 달았는데, 정3품까지는 옥관자(玉貫子), 2품은 금관자(金貫子), 1품은 다시금 옥관자(玉貫子)를 쓰게되므로 재상이 되는 것을「환옥(還玉)」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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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통(諭書筒) 1개(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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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체찰사 등에게 중대한 사명을 내릴 때의 지령서를 유서(諭書)라고 하였으며, 유서를 넣는 통을 유서통이라 하였다. 왕대의 마디 부근을 자른 양끝에는 장식을 박고 끈을 매었고 중심을 타원형(길이 14㎝)으로 오려내어 유서를 넣고 잠글 수 있도록 자물쇠를 만들어 달았다.
기세(氣勢)가 등등한 사람에게 "유서통 졌느냐?"라는 속담이 있는데 그 의미는 유서통을 매고 가는 사람은 도중에서 어느 것에도 걸릴 것이 없었던 것을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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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국지도서애선생수택본(東國地圖西厓先生手澤本) 1점(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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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오랑케에 대비하기 위하여 두만강 일대 육진의 방어시설을 상보토록 한 선생의 지시에 의하여 함경도북병사가 그려서 올린 지도이며, 왼편이 모두 손상되어 있으며 현재 삼수, 갑산, 단천, 길주, 명천, 경성(鏡城), 부령, 종성, 은성, 경원의 각 면과 아오지의 편면 만이 남아 있어 완본은 아닌 것 같다.
한지에 담채로 그려져 있으며, 가로 61㎝×세로 3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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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西厓先生母夫人昆文記) 1축(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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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선생이 32세 때에 선친이 별세하여 유산이 선생의 모부인(母夫人) 정경부인 김씨에게 상속되었으나, 그로부터 20년 후에 정경부인 김씨는 시댁과 친정의 제위토(祭位土)와 접빈용토지(接賓用土地)를 우선 분재(分財)하고 나머지 유산을 자녀에게 공평하게 분재한다는 뜻을 밝힌 분재기(分財記:재산과 노비를 자식에게 나누어주면서 이를 기록한 문서)로서, 매우 희귀한 종류의 문서이며, 크기는 가로 362㎝, 세로 67.2㎝로 한지에 행서체로 쓰였으며, 여러 곳이 벌레로 인해 훼손되었는데, 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財主母貞敬夫人金氏 (재주모정경부인김씨) 方形墨印
證家翁五寸姪從仕郞前英陵參奉李輔 (증가옹오촌질종사랑전영능참봉이보) 手決
三寸姪箕子殿參奉金應南 (삼촌질기자전참봉김응남) 手決
筆執四寸孫幼學申口 (필집사촌손유학신민) 手決
*方形墨印(방형묵인):네모형태 도장을 인주(印朱)를 사용치 않고, 먹물을 사용하여 찍었는데,
그 시대는 인주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임.
*手決(수결):
도장 대신에 자기 직함 아래에 자필로 쓰던 일정한 자형(字形)이며,
오늘날의 Sign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음.
* 일부 사진 출처 : 문화재청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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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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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 류성룡(柳成龍) 선생에게 내린 고문서들이며 공신녹권(功臣錄券), 교지(敎旨), 제문(祭文) 등 총14종이다. 이 문서들은 류성룡 선생 및 조선시대 공문서 양식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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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국공신교서(光國功臣敎書) 1축(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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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선조23년) 종계변무(宗系辨誣:명나라에 그릇 기재된 조선왕조 종계를 바로잡음.)의 공(功)으로 광국공삼등(光國功三等) 풍원부원군(?原府院君)으로 서훈되었으며, 이 교서는 가로 42.9㎝× 세로 115㎝의 긴 축(軸)으로, 년시(年時)는 만력(萬曆)18년(1590년) 8월이며, 한석봉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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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국공신과록패(光國功臣科祿牌) 2매(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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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년 1606년에 내린 2장의 공신과록권(功臣科祿券)이다.
- 大米 5石(쌀 50말)
- 小米 1石(좁쌀 10말)
- 太 2石(콩 20말)의 록(祿)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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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하사교지(奴婢下賜敎旨) 2매(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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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萬曆) 34년(1606)과 숭덕(崇德) 3년(1638)의 2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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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체찰사교서(都體察使敎書) 1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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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는 군의 작전을 조정ㆍ통제하여 왜적을 물리치라는 특별교지를 만력(萬曆)20년(1592년) 12월 23일 선생에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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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공시호교지(文忠公諡號敎旨) 1매(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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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인조 5년)에 서애 류성룡 선생에게「문충공」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시주(諡註)에 "道德博聞曰文(도덕박문왈문)이요, 危身奉上曰忠(위신봉상왈충)이라"고 부기(附記)하여 문충(文忠)의 뜻을 밝혔다.
※敎旨(교지):4품 이상에게 내리는 사령(辭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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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중추부사교지(判中樞府事敎旨) 1매(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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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임진년 5월에 영의정에서 물러나 계사(癸巳:1593년) 3월 충청·전라·경상도 등 삼도 도체찰사로 임면되었을 때 이 판중추부사의 교지를 받았다.판중추부사란 영의정을 역임한 이가 현직에서 물러나 한직에 있을 때 내려지는 직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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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성공신교지(扈聖功臣敎旨) 1매(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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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란 때 선생은 서울에서 의주까지 선조(宣祖)를 호종하였으며, 수도 서울의 수복에 공로가 컸다고 하여 1604년(선조 37년) 6월에 호성이등공신 으로 서훈되었는데 이것은 같은해 10월에 내린 한석봉 필적의 교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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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원부원군교지(豊原府院君敎旨) 1매(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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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선생이 우의정 당시 광국공신 풍원부원군으로 서훈되었으나 임진란이 끝나던 무렵인 1598년의 11월 19일 간신들의 무고로 삭탈관직 당하였다가(※ 이날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전사하였음.) 그 2년 후인 1600년에 직첩을 환급받았으며 1603년에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는데 이것은 그 때의 교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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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교지(領議政敎旨) 1매(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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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萬曆)20년(1592) 5월 2일 파천(播遷) 길에 있던 선조(宣祖)는 개성에서 선생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는데 그 때의 교지(敎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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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정경부인교지(贈貞敬夫人敎旨) 1매(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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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부인 이씨는 1589년(선조 22년) 선생이 예조판서로 계실 때 별세하였는데 그 후 선생이 영의정이 되자 1596년(선조 29년)에 정경부인 교지가 내려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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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윤비답(不允批答) 3매(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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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영의정으로 계실 때 여러 차례 사표를 제출하였는데 선조(宣祖)는 그때마다 "허락할 수 없다."는 답신을 내렸다.
그 중 만력(萬曆)24년 9월, 만력 26년 2월, 만력 28년 1월에 있었던 정사(呈辭)에 대한 불윤비답(不允批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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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제문(宣祖祭文) 1매(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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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부고를 받은 선조(宣祖)는 곧 승지 이유홍(李惟弘) 공을 보내어 조위를 표하고 예조좌랑 구헌(具憲) 공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그 때의 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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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王世子)(광해군(光海君))제문(祭文) 1매(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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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부음에 접하자 왕세자 광해군은 곧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 류항(柳恒) 공을 보내어 치제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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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제문(正祖祭文) 1매(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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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화성(수원성)을 조영할 때 승지 이익운 공을 보내어 선생의 묘우에 치제하고 선생이 제정한 "축성방략"을 가져다 보았는데 이것이 그때의 제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