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임하였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선생이 임진왜란때의 상황을 벼슬을 떠나 귀향한 후에 기록한 것으로, 저자는 임진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민족적 숙원에서 책명을「징비록(懲毖錄)」으로 하였다.
이 징비록을 통해 임진왜란 전의 일본과의 교린관계를 비롯하여, 전란(戰亂)에 임한 국민적 항쟁과 명나라의 구원 및 바다의 제패에 대한 당시의 전황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수 있어, 임진왜란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가장 대표적인 기본 역사자료가 된다.
필사본 징비록은 조수익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때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인조 25년에 16권7책으로 간행하였으며, 또한 이것은 숙종 21년 일본 교토 야마토야에서도 간행되어 1712년에는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았다.
징비록의 저술 동기에 대하여 서문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거기에 임진란 전의 일도 간혹 기록한 것은 임진란의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아! 임진란의 전화(戰禍)는 참혹하였다. 수십일 동안에 삼도(三都)를 지키지 못하고 팔도(八道)가 산산이 깨어졌으며, 임금께서 피란(避亂)하셨으니 그리고서도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천운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내 지난 일을 징계(懲)하여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毖)노라.' 고 했으니 이것이 징비록(懲毖錄)을 쓰는 연유라 하겠다. ............"
징비록에는 초본 징비록(草本 懲毖錄)과 간행본으로 징비록 16권본(懲毖錄 十六卷本) 및 징비록2권본(懲毖錄 二卷本)이 있어서, 모두 3종류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초본 징비록이 가장 원천이지만, 간행본인 징비록 16권본에는 초본 징비록에 실려 있는 것 외에도 근폭집(芹曝集) 2권과 진사록(辰巳錄) 9권 및 군문등록(軍門謄錄) 2권이 포함시켰으며 징비록 2권본은 초본 징비록에서 맨 끝의 잡록(雜錄)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저서를 통해 임진왜란 전의 일본과의 교린(交隣) 사정을 비롯하여, 전란(戰亂)에 임한 국민적 항쟁과 명나라의 구원 및 바다의 제패에 대한 당시의 전황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임진란에 대한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가장 대표적인 기본 역사자료가 된다.